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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관리자

20 년만에 추석을 맞았습니다.

20 년만에 추석을 맞았습니다.   


안녕하세요. 먼저 강효흔탐정님께 감사 드립니다. 우리가족모두는 이제너무행복하구요.강선생님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부모 형제잊어버려 가슴아픈가족들이 많아요 계속해서 노력해주세요.저는 이번에 기적이란것이 정말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21년전에 큰오빠가 미국인여자와 결혼해 미국으로 갔습니다. 단 두통에 편지만 보내온후 소식이 끊어졌습니다.오빠를 찾기위해 우리가족은 최선를 다해보았지만 허사였고, 미국에 건너가 신문에도 여러번 내고 했습니다만 역시 불가능하더군요.한국도 아니고 미국에서 우리힘으로 찾기는 더더욱 어렵더군요. 그렇지만 강효흔씨는 할수있고 우리가족이 그렇게 그리워하던 큰오빠를 찾아주셨습니다. 이번추석 미국에서 큰오빠가 돌아가신 엄마제사에 참석하기위해 18일날 21년만에 귀국합니다. 이것은 분명하게 기적입니다. 또다른 가족 상봉을 위해 노력해주세요. 부모 형제 헤어진 모든 여러분 저는여러분의 심정을 알수있어요. 포기하지 말고 찾으세요. 찾을수있어요. 우리가족처럼 행복할수있어요. 끝으로 강효흔씨께 다시 한번 감사 인사드리고 싶고 이번추석 행복하게 보내세요. 안녕히 계세요.                                                        김미경  ☞  관련기사 <동아일보 참조>

30 년의 그리움 이렇게 쉽게 찾을 수 있을줄 몰랐습니다. 

강효흔 탐정님 정말 감사 합니다!! 반신반의 하며 보냈던, 메일 이였습니다. 30년전쯤 연락이 끊긴 이모님을 이렇게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것도 국내도 아닌 미국에서 믿기지 않습니다. 이모님과 전화통화 후 할머님과 어머님의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며 강효흔 탐정님께 정말 어떤말로 감사의 표현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다. 너무너무 감사드리구요.. 항상 건강하십시요..

 박은숙  

부처님과 하느님과 강효흔님께 감사 드립니다    

감사의말씀을 무엇부터 무엇을 어떻게 드려야 될른지? 오늘이 태어나서 가장 기쁜날이라고 정하고 싶습니다

강효흔님!

정말 당신은 죽은동생을 살려 놓은 위대하고 훌륭하신 의사선생님 이상으로 존경합니다 새벽2시경 고요한적막속에 요란한 전화벨소리에 놀라 받아보니 "오빠.오빠"라는 울먹이는 목소리에 30여년그립고 그리운 동생목소리가 제발 꿈이 아니길빌며 제살을 꼬집으며 상봉을 했습니다.  몇시간이 지난 지금도 꿈인가 생시인가 싶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끊고 또 전화를 걸어 보고 전화를 다시해 보라하고 이렇게 하루날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이제는 아무른 소원이 없습니다  굳이 있다면 우리가 더 건강하게 살면서 30년간 못보았던 세월을 남은 세월동안 더 많이 보면서 사는 것 뿐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아니 백번천번이라도 귀하는훌륭하신 일을하고계십니다 현재도 앞으로도 우리와 같은 가슴아픈 사연들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이런분들을 위해 더 열심히 많이 활동해 주십사 하는 부탁 부탁 또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오늘의 은혜잊지 않겠습니다

또다시 메일이라도 인사드리겠습니다                                3/5/2002  대구에서 김재왕

15 년만에 재회한 프랑스 - 미국 친구

강효흔탐정님께 감사한맘을 전하면서 그리운 분들을 찾고계신 많은분들 희망을갖고 언젠가는 꼭 만날수있길 바라보며 몇자 적으려합니다 전 프랑스에서 만16년째 살고잇는 박인혜라고합니다 국민학교때부터 줄곧 단짝으로 지내던 친구가있었읍니다 이친구와는 여고,전문대를 까지 줄곧 단짝으로 지내며 친자매라고해도 과언이아닐만큼 절친한 사이였는데 16년전 전 파리로 유학을나온후 이렇게 계속 이곳에서 자리잡고 살게되었고 친구는 약14년전 재미교포와의 결혼과함께 미국으로 들어가게됨으로써 우린 말그데로 국제이산가족이 되었뎄습니다 그래도 서로 끊임없이 소식은 전하며 지냈는데 약5년전 친구의 갑작스런 이사와 이내 생긴 저의 이사로인해 우린 우연치않게 소식을 잃게되었고 막연하게나마 곧 소식이 닿을거라는 기대와는달리 여러해를 거듭하면서 저의 조바심은 날로더했고 어느날 우연히 시작하게된 컴맹의 실력으로 약일년간 무난히 친구를찾는일에 애를써보았었으나 별 성과가 없던차에 말그데로 아주우연히 강효흔탐정님에대한 기사를보게되어 부탁드린지 몇칠만에 혹시나하던꿈같던일이 역시나로 현실에 이루어 졌답니다 아직 친구를만나지는못햇지만 그사이 긴통화를몇번이나 나누었고 15년동안 못만난, 5년동안 소식끊혀지낸 모든 지난시간들이 등뒤로 지나가며 바로 엊그제까지라도 함께있었듯한 느낌이 더 강하기만하답니다 바로 이런것을 우정이라고하는건지요,,,, 올해안에는 우리국제이산가족도 꼭 상봉할수있도록 바래보며 힘찬 새해를 시작할수있으니 이 감사함을 다시한번더 강효흔탐정님께 전하고싶고 혹시 많은분들이 저처럼 아니 저보다 더간절히 찾고 기다리시는 분들을 하루속히 만나뵐수있길 더불어 기원해봅니다               

                                                        1/3/2002   프랑스에서 박인혜  ☞ 관련기사 <동아일보 참조>

30 년만의 누이와 상봉

무슨 말부터 쓰야할지 잘 모르겠지만 우선 강선생님에게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부터 전하여야 되겠읍니다. 이렇게 고마운 마음을 그무슨 뜻으로 표현하겠습니까?   다시 한번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는 누님과 연락이 두절되어 30여년의 긴세월 동안 생사를 확인할수 없는 처지에서 그리운 마음으로 보내야 했습니다.   그 수많은 나날들을 되돌아보면 정말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읍니다. 11월 6일 새벽 3시경 너무나도 보고싶고 반가운 목소리를 이귀로 확인 할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직접 상봉은 하지 못하였으나 누님과 벌써 몇번의 전화연락을 하였읍니다. 처음 강선생님의 메일을 받고 사실 많이 망설인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못미더워하는 저의 메일 답장에 대하여 선생님은 확실한 신념을 주시었읍니다. 잠시나마 강선생님을 신뢰하지 못한면에서 미안한 마음이 들고 이점 이해해주시리라 사료됩니다. 결과적으로 강선생님의 노력하신 덕분으로 저로서는 도저히 할수없었던 일을 성사 시켜주셨읍니다. 지금의 이심정 같으면 선생님께 너무 고마운 마음에 넙죽 엎드려 인사라도 드리고 싶지만 그렇게는 할수 없고 이렇게 메일을 통하여 선생님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앞으로 행여나 저와 같은 사정이 있는 분에게는 적극적으로 선생님을 추천 하겠습니다.   강선생님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하시는 사업이 날로 번창하옵고 건강한 몸으로 항상 행운이 깃들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11/9/2001  경남통영에서 문기봉드림  

정말로 꿈만 같은 일이 일어 났습니다

정말로 꿈만 같은 일이 일어 났습니다 강 효흔 탐정님 감사합니다. 32년 전에 헤어진 언니를 찿으려고 한국 주재 미 대사관 .각 TV방송국 . 적십자사 . 미국주재 한국 대사관 . 영사관 .등 관계기관은 문의 해 보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우연히 "주간 동아"를 보다가 그리운 얼굴 찿기 캠페인에서 강 효흔 탐정님의 기사를 보고 신청하였으나 막상은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워낙 찿다가 실망을 많이 하여) 그런대 이게 웬일 입니까 신청한지 하루 만에 32년을 목메어 그리던 언니를 찿게 되였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강 효흔 탐정님이 무슨 신통력을 갖고 있는 산신령 같은 느낌이 듭니다 거듭 감사 드립니다                                양 양순

입양 보냈던 딸과의 상봉

그동안 참으로 애쓰셨습니다. 하루에도 열두번 씩 e-mail을 열어보았으나 소식이 없어 불안한마음이 날로 커져가고 있는데 선생님의 서신과 함께 김현미기자님의 전화를 받고 얼마나 기쁘고 설레 이든지요. 저뿐 아니라 선생님께서도 얼마나 기쁘고 보람되셨겠어요. 오늘(16일) 오후 2시경 홍삼분 할머니와 미국의 따님이 전화로 상면하는 장면을 보며 그 감격을 표현하기란 저의 말로는 모자랄 것 같습니다. 어제 오후엔 여러 노량진 교회 성도들께도 전화를 드렸고 모두들 숙원하던 일을 이루어 주신 선생님과 동아일보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렸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어젯밤 한숨도 못 주무시고 아침도 거른 채 꿈만 같은 재회의 순간을 고대하셨답니다. 오늘 김현미 기자님과 사진기자님 한 분이 노량진 경찰서 뒤에 위치한 저의 교회를 방문해 주셨고 선생님께서 애쓰셔서 보내 주신 연락처로 전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친분있는 미국 선교사님이 먼 거리를 달려와 통역을 해주 셨고 현옥씨와의 통화는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습니다. 너무도 큰 기쁨인지라 할 말을 잊은 채 마치 늘 만나던 딸에게 전화를 하는듯 "나 이빨 많이 빠져서 말이 샌다.... 니 남편 이름이 뭐냐...나 많이 늙었다..." 등으로 말 문을 트셨습니다. 얼마나 감격의 순간이든지요. 선교사님의 긴 통역으로 신변 근황등 e-mail address,그리고 서로의 대면을 약속하며 통화를 끝냈습니다. 무엇인가 아쉽고도 ...꿈처럼 어리둥절하신 할머니를 뵙고 그동안 막혔던 체증이 사라진 듯 가슴이 시원하더군요. 강선생님 다시한번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한국에 언제 오시면 노량진 교회에 꼭 한번 방문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 교회 성도들도 주간동아를 통해 선생님의 사진을 뵈었을 뿐 아니라 너무도 좋은 일을 하시는데 대해 감사하십니다. 모쪼록 이러한 일이 생이별의 아픔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격려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앞으로 할머니의 근황과 따님과의 남은 만남의 순간들을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 이보다 더 크고 보람된 일이 또 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안녕히 계십시오...                                                                                         이해옥 드림 ☞ 관련기사 <동아일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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