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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관리자

40년 희망의 결실

40년 희망의 결실


"희망" 이란 두글자를 안겨 주신 강효흔탐정님께 먼저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40년이란 세월속에 마르지 않는 눈물과 보고픔의 그리움이 나를 항상 힘들게 했습니다 얼굴 한번 보지 못한  나에게 두언니가 있었다니 너무나 놀라웠지요 나의 어릴 적 나의 어머니는 왜 그렇게 울고 또 울고 했었나  생각하며  나 또한 옆에서 울던 기억이납니다 평생을 그리워하며 두언니 생각에 눈물을 흘려야했던 불쌍하고 안쓰러운 나의 어머니.  난 두언니를 언젠가는 꼭 찾아 보겠다는 생각을하며  두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점점 성장했지요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으면서 삶에 바쁘다보니 시간은 점점 더 흐르게 되었고  혹여 TV에서  두언니가 우릴 찾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보았었지요

그후 난 2007년 12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고 2008년 1월 홀트아동복지회를 방문하여 두언니에 대한 여러가지 소식을 접한 후 본격적으로 두언니를 찾아 보려고 애를 쓰기 시작했담니다 각종 인터넷 싸이트및 각 기관 또는 방송국 레인보우센타 (경찰서) 내가 알고 있는 방법은 모두 알아 보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기다림의 시작이였습니다.하지만 막상 찾으려고 하니 그 기다림은 1일도 너무나 먼 시간으로 느껴졌고 여기저기 인터넷 싸이트를 좀도 뒤져 보기로했습니다.  그때 내눈에 비췬 "강효흔 공인 탐정소" 미국정부가 전문성을 인정하는 기업인과 동시에 경제범죄수사전문  이산가족및 입양인찾기에도 뛰어난 발휘를 하고 있는 믿음이 가는 곳이였다 여러사람의 고객 체험담을 읽기 시작하면서 이곳이야말로 나의 마지막 희망이자 좋은 소식을 가져다 줄수 있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 즉시 난 메일을 강효흔 탐정님께  6월4일날 정확하지는 않지만 알고 있는 사연과 기록을 보냈었고 5일쯤 두언니께서 머무는 곳이 어딘지 확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너무 빠른 소식에 가슴이 뛰었다.  6일날 강효흔 탐정님은 날 대신해서 두언니께 편지를 띄워 주었고 편지를 받아 본 언니는 강효흔 탐정님을 통해 연락이 왔었다.  그날 난 떨리는 마음으로 언니와 간단히 통화 할수 있었다. 통역은 강효흔탐정님께서 애를 써 주셨다. 가슴벅차고 눈물이 났었지만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로 인해 가슴이 더 아파 오기 시작했다. 6월11일 또다시 부모님및 형제들과 1시간이 넘도록 언니와 함께 통화를 했었다.    나의 언니는 한국노래를 배워 나에게 들려주었다 너무나 감동적이고 뜻밖이였다.

긴 시간 함께 통역해 주신 강효흔탐정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얼굴은 뵙지 못했지만 시종일관 정다운 목소리로 양쪽의 말을 전해 주신 점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좀더 빨리 이곳을 알았더라면 두언니를 더 빨리 찾을 수 있었을텐데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헤어진지 넘 오래라 찾고도 싶었으나 또 한편으로는 너무나 두렵기도 했었지요.  용기를 갖고 막상 찾아보니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후 두언니의 사진과 가족들의 사진도 받아 볼수 있었습니다.  부모님께 두언니의 소식과 사진을 보여 줄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했답니다.

저처럼 누군가 너무나 그립고 보고 싶다면 망설이지 말고 강효흔탐정님께 문의해 보세요 여러분도 좋은 소식으로 다른 어느곳 보다 빨리 만나보실 수 있을거에요 (특히 사기단 조심하시구요) 다시한번 강효흔 탐정님 항상 행복하시고 건강하시길 바라며 저희에게 희망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08년 7월 경기도 고양시  백석동   정 삼례 드림


32년만에 찾은 고모

강팀장님께 말로만 감사할수밖에 없는것이 한스럽습니다

이렇게 쉽게 고모님을 찾을수 있으리라고 꿈엔들 생각했겠습니까. 너무 쉽게 찾아서 그런지 실감이 더 안나는것같습니다.

저희 고모님께서는1972년에 미국인고모부와 결혼을하시고 77년도에 한국을 마지막으로 오셨다 가셨습니다. 그리고 연락이 끊겼습니다.......제가 초등학교 4학년 무렵에 마지막으로고모님을 뵈었습니다.   그런 저도 가끔 고모가 그립고 보고싶었는데 형제간들은 얼마나 더 보고 싶었을까요. 하지만 ?을 방법을 몰라 아예 찾을 엄두도 못내고 30년이 훌쩍넘어버렸습니다.

저희 식구들은 고모가 평소에 몸이 약해서 돌아가셨다고 믿고 절에 가면 영가등도 켜놓곤하였습니다.  또 한편으론 고모부와 안좋아서 말도안통하는곳에서 구박받고 살고있는것이 아닌가하는 걱정도 했지만 어쩔수 없었지요.

그런데 둘째오빠인 저희 아버지께서 정말 생사라도 알고 싶다고 눈물로 호소하셨습니다. 자식된 입장으로 아버지의 소망을 이뤄드리고 싶으나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을 이리저리 뒤지다가 심부름쎈타에다 전화해봤습니다. 그랬더니 500만원 달라고 하더라구요 그래도 찾으면 아깝지 않으나 확실하게 찾는다는 보장도 없다고 하더라구요.

어쩔까 고민하던중 아주 우연히 정말 재수 좋게 강효흔 탐정님의 사이트를 본겁니다.  정말 일주일도 안돼서 이렇게 쉽게 찾아 주시라고 반신반의했던 저희 가족들에게 커다란 선물을 주셨습니다.

저희 고모께서 처음에는 서로 연락하면 고향에 오고 싶어 일부러 연락을 끊었답니다. 그리고 어느정도 세월이흘러선 연락이 안되어서 우울증으로 고생을하고 계셨습니다 가족 들이 너무 그리워  자살까지 시도 하셨답니다.  다행이 고모부님의 따뜻한 베려로 잘지내고 계셨답니다 . 조만간 고모부님 휴가에 마쳐 한국에 오실거랍니다.

저희고모께서도 이렇게 넓은땅에서 어떻게 나를 찾을수 있었냐며 놀라워하셨습니다.  저희 아버지께서도 유능한 딸을 두셨다고 저의 칭찬이 늘어집니다.  강 탐정님 덕분에 저 까지 유능한 사람이 되었답니다.

강탐정님!  저희 아버지의 소원을 풀어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정말 정말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저희 가족같은 이들에게 천사의 모습으로 계속서 계시길 간절이 원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요~

 "32년만에 고모를 찾은 정혜경 드림     2008. 7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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