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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관리자

생사도 모르던 누님과 상봉

생사도 모르던 누님과 상봉

안녕하십니까? 조 상 철 입니다. 20여년동안 서로의 생사를 모르고 지내던 우리 형제들에게 이렇게 고마운 소식이 올줄이야.. 너무 감사드립니다. 저는 한국에서 컴퓨터 업종에 근무를 하면서 미국에 간 누님의 소식을 알아보려고 백방에 알아보았으나 실패로 끝났습니다. 우연히 강효흔 탐정님의 싸이트를 아는 순간 거의 100%의 확신을 갖고 의뢰를 하였습니다. 그 믿음이 결과 인지 제가 메일을 보내고 전화통화를 한지 3-4 시간 후에 연락이 왔습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현실인가 멍했습니다. 이어 누님의 전화 번호를 알려주신대로 전화를 하니 너무 반가워서 정신이 없었습니다. 정신을 가다듬고 그간 이야기를 해보니 서로의 찾는 마음과 노력을 하였으나 각각의 기관들이 시간이 너무 흘렀다거나 정확한 주소를 원하여서 현실성이 없는 것만을 요구하였습니다. 사실 애타게 찾는 사람들은 그런 데이타가 있으면 그동안 연락도 못 했을 리가 없겠지요. 각설하고 이렇게 찾을 수 있게 하여 주신 강효흔 탐정님께 거듭 감사드리고 아직도 이곳을 모르는 분들에게 널리 알려야겠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제 전화 상봉의 흥분이 가라 앉치고 서로의 만남을 기대하면서 늦게나마 글을 올린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강효흔 탐정님의 앞날에 더욱더 좋으실 날이 있으시길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감사합니다.                                                                           조상철  


초등학교 친구와 재회


우선 강효흔 탐정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얼굴도 보지 못하고 부탁을 하는 것이라 여러가지 걱정이 앞섰습니다.. 하지만 강 탐정님께서 보여주신 인간적인 면과 친절함 덕분에 믿고 맡길 수 있었습니다. 헤어진지 10년 된 초등학교 때 친구를 강효흔 탐정님이 아니었으면 아마 찾기 힘들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을 찾는 애타는 심정을 이해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서민근

어릴 적 헤어진 아버지와 17년만에 상봉

어떤 말로도 이 은혜를 대신할수는 없지만......... 제 삶을 바꿔주신 강효흔 탐정님께 다시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일명 흥신소같은곳을 생각했었습니다 그저 돈받고 몇가지정보만 주고서 다시 돈을 요구하고....결국 그러다가 찾지도 못하고 시간과 돈만 낭비하게되는....그리고 무엇보다도 절망만 더 크게 안겨주는 그런 이기적이 단체는 아닐까하고 의심도 많이 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눈물을 흘렸지만은 이번처럼 만큼의 기쁜눈물은 아마 제 인생의 처음일겁니다. 제가 늘 그리워하던 제 아버지를 다시 만나다니 너무나도 꿈만같습니다...지금도 꿈이 아닐까하는 걱정이 들기도 하구요.... 강효흔 탐정님..... 경제적 형편으로 찾고싶어도 찾지 못해 발만동동 굴리고 있던 저에게 선뜻 무료로 찾아주시겠다고 했을때도 이루 말할수 없이 감사했구요.....제가 15년동안 찾지못했던 아버지를 이틀만에 찾아주셨을때는 정말 그 고마움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수가 없었지요.... 저희 아버님께서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아드려야 할지.....제 인생을 다시 주신 탐정님을 꼭 한번 뵙고 싶습니다. 그리고 탐정님께 부탁드리고 싶은것이 하나 있습니다 저희 한국에는 저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계십니다. 여러가지 사연으로 가족들이 헤어지고 만나지 못하는 .....그리고 찾을수 없다고 이미 체념하고 사시는 많은 분들에게도 희망과,저와같은 기쁨을 누릴수있는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에서도 탐정님의 회사에 대한 홍보를 많이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알고 있는 사람들보다는 알지 못하여 힘든 삶을 사시는 분들이 많이 있거든요....저 역시도 그런분들을 만나게되면 꼭 탐정님의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탐정님 조만간에 미국에 한번 방문할거 같습니다......그때 꼭 만나 뵐수 있어으면하는 바램을 해봅니다... 다시한번 감사드리며......늘 행복을 주시는 분이 되시길.......탐정님도 늘 행복하시구요........

                                                                     서울에서......이경용드림

20 여년만에 할머니 소원 풀어드렸습니다.

강효흔 탐정님 정말 감사합니다!! 어떤 말로 표현을 해야 할지... *^^* 저는 이번에 저희 숙부님을 찾기 위해서 의뢰를 했습니다. 사실 저는 저희 숙부님의 얼굴을 사진으로 밖에 본적이 없습니다. 어떤 분이신지는 잘 모릅니다.가끔 가족들에 이야기 속에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작은집 식구들의 이야기를 하시면, 저는 숙부님과 사촌들을 상상 속에 그려보곤 했습니다. 그분들은 제가 태어나는 해에 이민을 가셨으니깐요.. 저희 큰집과 작은집은 그래도 작은 꿈이 있었습니다. 다들 그 시절 말하던 코리아드림 .. 그래서 저희들 중 작은아버지 가족들이 먼저 이민을 가셨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마음데로 되는 것이 아닌지... 한국에서 하시던 아버지 사업이 기울고, 타지로 이민을간 작은아버지 가족들 또한 숨가뿌게 살아가다 보니 연락이 끊기고 말았습니다. 항상 그리움 마음을 가지고 20여년을 가족들이 보내는걸 보고 자랐습니다. 집안 사정이 좋아지면 찾아야지 했지만 막상또 찾으려고 하니 찾는 방법 또한 그 넓은 미국이란 국가에서 막막함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국등지에서는 탐정분야가 많이 확산되어있고 체계적인 관리를 하고 있다고는 들었지만 솔직한 마음에는 반신반의한 맘으로 의뢰를 했습니다. 하지만 강효흔 탐정닝께서는 중간중간 상황을 말씀해주시고 저희 작은집의 사정상 이사를 많이 다녀서 찾으시는데 번거러웠지만, 오히려 저에게 격려를 해주시며 두터운 신뢰감과 인간애까지 느끼게 해주셨습니다. 처음에는 사실 부끄럽지만 약간의 의심을 했던 전 이렇게까지 열심히 해주시며 신뢰감을 느끼게 해주신 진짜 프로인 탐정님께 가족을 찾은 지금 말로는 표현 못할 감사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시는 일 번창하세요 ^^ 감사합니다!!

이나진 드림

어머니와 재회한 추석 날 아침

추석 아침 이민 후 서로 이사로 인해 10여년간 소식이 끊인 어머니와 신청 하루만에 상봉이 이루어 졌습니다

28 년동안 쌓인 이산의 아픔은 2 일만에 기쁨으로

어제 고모를 찾았다는 강탐정의 전화를 받고 너무나 당황해서 숨이 벅차 오르는 것을 겨우 내려 앉혔습니다.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정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고모생각만 하면 어떠케 하면 찾을 수 있는가 하는 생각만 했지 어떻게 손을 써볼 도리가 없었는데... 가족들은 고모님과 통화를 하고 나서도 믿겨 지지가 않는다고 너무 기뻐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합니다.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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